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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말씀의 영입니다 | 디모데후서 3:16-17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경건한 삶을 사모하는 사람은 성령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의지만으로는 경건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심한 일을 끝까지 지켜내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간혹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만,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힘으로 경건에 이르러 경건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는 우리 의지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혼자 읽으면서 배우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말씀 사역자들의 가르침과 좋은 설교자들이 남겨 놓은 설교집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시는 가장 좋은 교사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말씀을 믿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이 이 진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곧
전도는 씨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 마태복음 13:1-9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전도할 때 결과에 대한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 주마다 말씀을 준비해서 전해야 하는 목사도 결과에 대한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도의 부담 때문에 전도하는 일을 주저하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인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와 씨를 뿌리는 방법은 그 지역의 날씨와 관련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은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기간보다 비가 오지 않는 기간이 좀 더 깁니다. 비가 오지 않는 기간 동안 땅이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그 지역은 단단한 바위 위에 흙이 조금 있는 경우가 많아 농사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농부들은 씨를 뿌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 | 창세기 4:16-17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한 이후의 인류는 죄의 본성을 가친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죄는 벗어버릴 수도 없고 떨쳐버릴 수도 없으며 멀리 달아날 수도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죄는 인류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예리하게 날이선 칼을 가지고 있어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본성은 죄에 완전히 잠식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 놓은 아름다운 형상이 아니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옥으로 치달아가는 급행열차와 같았을 겁니다. 무죄한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유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배의 벌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흉악한 죄인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재판은 끝났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에 그려왔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가인은 여호와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 야고보서 1:1-2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야고보서의 기록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 믿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 가정에서 자란 가족이라는 관계가 믿음을 갖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인정받기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사렛과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죠. 나사렛과 가버나움 역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많은 이적이 행해졌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초기 교회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그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열두 사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주의 형제라는 특별한 관계가 야고보에게 권위를 부여해주었습니다. 야고보가 초기 교회에서 권위를 가지게 된 이유가 더 있습니다. 야고보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아 예
돌이키지 않는 마음 | 창세기 4:9-15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가인은 아담과 하와가 보지 않는 곳으로 동생 아벨을 불러내어 죽였습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동생의 몸을 빈 들에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부모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가인은 가족의 슬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 없는 삶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가 사라져버린 세상에 만족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에 대해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벨을 가리켜 "네 아우"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아벨은 가인의 동생이었습니다. 원수나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원수처럼 여겼고,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대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복된 가정 | 에베소서 6:1-4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저는 하남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정이 주안에서 복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가정들도 있죠. 성도들의 가정들이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배우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자녀들이 예배의 자리를 회복해 함께 예배하는 가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주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6장은 가정에서 기억하고 지켜야 할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예배하는 현장에서 시작해 가정과 일터까지 확장됩니다. 예배와 가정과 일터가 일관성을 가질 때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신자들은 가정에서도 주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예배의 복이 가정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복된 가정은 순종과 양육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 동기 | 창세기 4:8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사람의 상태는 비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를 타락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에 다 담기지 않는 비극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여인을 보고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노래했던 아담이, 자신을 타락의 길로 이끈 것이 하와라고 비난할 때 산산히 부수어진 관계를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한 몸이었던 사람의 관계가 파탄난 것은 앞으로 펼쳐질 비극의 전조에 불과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어머니와 한 아버지를 둔 형제요 가족이었습니다. 한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았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으니 가족이었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으니 식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불편한 감정이 둘 사이에 스며들었고, 결국에는 두 사람이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골짜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견딜 수 없었고, 아벨은 가인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조건 | 창세기 4:1-7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창세기를 가리켜 "시작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번째 책, 성경을 여는 시작의 책이라는 의미가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를 시작의 책이라 말할 때 이 말에 담긴 또 다른 의미는 창세기가 모든 것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4장은 예배의 시작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살인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경험과 살인의 경험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두 경험이 한 곳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 또한 역사입니다. 창세기 4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담과 하
실족하게 하는 일을 조심합시다 | 마태복음 28:1~20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누가복음 17장은 실족하게 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실족하게 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한 후 범죄하지 않도록 삼가하고 조심하라는 교훈을 충격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실족하게 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한 후에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권면이 이어집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장애물이나 올무를 놓아두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거나 올무에 걸려들게 하는 것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은 연약한 성도가 죄를 짓게 하거나, 신앙을 떠나게 하는 일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하는 부주의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연약한 신자가 죄를 짓거나 신앙에서 떠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매수된 증인, 참된 증인 | 마태복음 28:1~20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안식일이 지난 첫날, 지금 우리 시간으로는 주일 이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서쪽에 있는 막달라라는 마을에 사는 마리아입니다. 같은 이름이 많을 경우 그가 사는 지역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여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8:2). 예수님의 사역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에 그 섬김의 삶도 특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까지 동행했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인이었던 거죠. 막달라 마리아에게 사도의 직분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에게 요구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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