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News
웃시야는 오만한 폭군이었을까? 경건하고 현명한 군주였을까?|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웃시야는 열여섯 살에 왕이 되어 오십이 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웃시야가 왕이 될 때 그의 곁에는 선지자 스가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는 웃시야 왕의 멘토가 되어 선한 길로 인도했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한 선지자의 지도를 받으며 경건하고 신실한 군주로 살아가게 됩니다. 웃시야가 다스리는 동안 국가질서가 확립되었고, 농업 생산성도 향상되었습니다. 황무지에 우물을 파서 가축을 기르고 작물을 가꾸었습니다. 군사적으로 탁월해 블레셋과의 전투에 연이어 승리해 다윗과 솔로몬의 때의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외교력을 발휘해 암몬으로부터 조공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요새를 건설해 국경을 튼튼히 했고, 삼십만에 이르는 정예 병사를 양성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웃시야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군사적 안정을 기반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웃시야 왕의 다스림으로 인해 유다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 가장 번영한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백
이사야서가 말하는 남은 자는 어떤 사람일까?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이사야서 1장 9절에 "생존자"라는 단어는 "남은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남겨진 무리" "피한 자"등으로 표현된 단어들은 "남은 자"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남은 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약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남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시대에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죠.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벌하고 다시 정결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심판을 통과하고 남은 자들은 정결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고 남은 자들은 거룩한 씨와 그루터기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서 6장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왜 크게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는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진보해 왔습니다. 이는 매우 자명한 사실입니다.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 사례가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원대한 꿈을 가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곧 마을을 형성했습니다. 그다음 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5마일 길이의 도로를 건설하자고 제안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로 건설 공사는 공공 자금의 낭비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청교도들은 황무지 5마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었습니다. 바다를 건너오는 대범한 결정을 한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후에는 작은 마을에 갇혀 평생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크게 생각하는 법을 알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생각하는 법을 모른 채 리더인 사람은 없습니다. 크게 생각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으면 공동체는 성장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이유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우리는 정기적으로 감사의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감사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기적으로 감사의 절기를 지키도록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매일이 감사의 날인데 신약교회에 절기가 왜 필요한가? 감사 절기를 만든 것은 헌금을 더 거두기 위한 꼼수 아닌가?" 감사절기가 헌금을 거두기 위한 꼼수 정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는 오해입니다. 사람은 반복되는 일에 익숙해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쾌락적응"이라고 부릅니다. 좋은 환경과 큰 축복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매일의 감사는 일상의 일이 되고, 어느 날 부터 감사의 감격이 무뎌집니다. 우리가 가진 본성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감사의 날이 필요해집니다. 특별한 감사의 날은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을 새롭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룬 일을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 믿고 싶어 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
생각이 변하기 원한다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생각이 변하면 운명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를 바꾸고 싶다면 지금 우리의 생각을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면서 이전과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이전과 다른 미래를 기대한다면 지금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첫째, 좋은 정보를 받아들이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정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좋은 정보를 받아들이면 좋은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강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좋은 말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좋은 정보를 많이 접할수록 생각의 변화 속도가 빨라집니다. 둘째,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미래가 바뀌기를 원한다면 만나는 사람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전과 같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이전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한 사람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시련을 통해 성장합니다|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우리는 고통과 상처 없는 삶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기를 소망하죠. 그러나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현실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온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땅이 말라버릴 때도 있습니다. 고통과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죠.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경험하고 있고 상처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다만 고통과 상처를 대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고통과 상처가 성장의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할 때마다 견디는 힘이 커지고, 상처를 받을 때마다 지혜가 자랍니다. 언덕 위 나무가 거친 바람과 가뭄을 견디며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거친 바람과 매서운 가뭄을 견뎌내는 힘이 있습니다. 마을과 역사를 같이해온 나무도 처음에는 작았습니다. 작은 나무가 크게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람과
좌절 내구력이 필요합니다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우리 자녀들은 자라면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수능시험을 치르기 위해 배워야 할 과목도 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학교 교과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주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조선미 교수는 "좌절 내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좌절 내구력"은 자신의 욕구가 즉시 충족되지 않거나, 원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방해가 있을 때 발생하는 부정적인 감정과 스트레스를 견뎌내고 일상적인 평온함을 회복하는 능력입니다. 좌절을 경험하지 않고 자라는 아이는,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성인이 되어서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적절한 좌절을 경험하고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좌절 내구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좌절을 경험할 때 부모가 즉시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주게 되면, 자녀는 좌절 내구력을 키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조선미 교수는 지나친 공감의 위험성을 경고하
공감은 심리적 통제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공감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불안 지수가 높은 사회 환경의 영향이 큽니다. 가족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을 때에는 공감에 대해 지금처럼 많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공감에 목말라 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평소에 적절한 공감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의 감정에 공감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공감은 중요한 정서적 자질입니다. 그러나 공감이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감정에 공감해 주는 사람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는 감정을 이해해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두었던 비밀한 이야기까지 쏟아냅니다. 나의 감정에 공감해 주는 사람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믿고 한 이야기들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비 종교는 공감을
죄가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가장 큰 증거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경건함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한 감각이 깨어있습니다. 반면에 경건에 대한 어떤 열망도 없는 신자들에게서는 죄에 대한 감각이 빌견되지 않습니다. 죄가 신자의 마음 속에 살아서 날뛰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현상은 죄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입니다. 죄는 사람들의 눈을 아둡게 해 죄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죄가 가진 가장 큰 위력입니다. 죄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은 채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누군가 그 일은 죄입니다라고 말하면 당장 나타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변명과 합리화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 주위 사람 때문에, 상황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합리화합니다. 괜찮아.
이끄는 사람에게 탁월한 자질이 요구되듯, 따르는 사람에게도 탁월한 자질이 요구됩니다 | 목회칼럼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교회의 직분자들은 이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회중들은 따르는 사람이 되겠죠. 따르는 사람들은 이끄는 사람에게 탁월함을 요구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탁월함은 이끄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덕이 아닙니다. 따르는 사람에게도 탁월함이 요구됩니다. 탁월함을 가진 사람이 직분자가 된다고 해서 교회가 저절로 잘되는 일은 없습니다. 회중들이 탁월함을 가지고 함께 할 때 비로서 교회가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따르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이끄는 사람의 동반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분자를 경쟁 상대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비판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포장하기도 합니다. 비판이 사라진 교회는 독재가 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하기도 하죠. 이런 비판자들로 가득한 교회는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거듭된 비판은 직분자들을 쓰러뜨릴 뿐입니다. 탁
bottom of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