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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키지 않는 마음 | 창세기 4:9-15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가인은 아담과 하와가 보지 않는 곳으로 동생 아벨을 불러내어 죽였습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동생의 몸을 빈 들에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부모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가인은 가족의 슬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 없는 삶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가 사라져버린 세상에 만족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에 대해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벨을 가리켜 "네 아우"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아벨은 가인의 동생이었습니다. 원수나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원수처럼 여겼고,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대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복된 가정 | 에베소서 6:1-4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저는 하남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정이 주안에서 복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가정들도 있죠. 성도들의 가정들이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배우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자녀들이 예배의 자리를 회복해 함께 예배하는 가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주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6장은 가정에서 기억하고 지켜야 할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예배하는 현장에서 시작해 가정과 일터까지 확장됩니다. 예배와 가정과 일터가 일관성을 가질 때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신자들은 가정에서도 주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예배의 복이 가정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복된 가정은 순종과 양육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 동기 | 창세기 4:8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사람의 상태는 비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를 타락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에 다 담기지 않는 비극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여인을 보고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노래했던 아담이, 자신을 타락의 길로 이끈 것이 하와라고 비난할 때 산산히 부수어진 관계를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한 몸이었던 사람의 관계가 파탄난 것은 앞으로 펼쳐질 비극의 전조에 불과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어머니와 한 아버지를 둔 형제요 가족이었습니다. 한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았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으니 가족이었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으니 식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불편한 감정이 둘 사이에 스며들었고, 결국에는 두 사람이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골짜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견딜 수 없었고, 아벨은 가인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조건 | 창세기 4:1-7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창세기를 가리켜 "시작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번째 책, 성경을 여는 시작의 책이라는 의미가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를 시작의 책이라 말할 때 이 말에 담긴 또 다른 의미는 창세기가 모든 것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4장은 예배의 시작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살인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경험과 살인의 경험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두 경험이 한 곳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 또한 역사입니다. 창세기 4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담과 하
실족하게 하는 일을 조심합시다 | 마태복음 28:1~20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누가복음 17장은 실족하게 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실족하게 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한 후 범죄하지 않도록 삼가하고 조심하라는 교훈을 충격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실족하게 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한 후에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권면이 이어집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장애물이나 올무를 놓아두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거나 올무에 걸려들게 하는 것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은 연약한 성도가 죄를 짓게 하거나, 신앙을 떠나게 하는 일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하는 부주의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연약한 신자가 죄를 짓거나 신앙에서 떠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매수된 증인, 참된 증인 | 마태복음 28:1~20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안식일이 지난 첫날, 지금 우리 시간으로는 주일 이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서쪽에 있는 막달라라는 마을에 사는 마리아입니다. 같은 이름이 많을 경우 그가 사는 지역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여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8:2). 예수님의 사역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에 그 섬김의 삶도 특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까지 동행했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인이었던 거죠. 막달라 마리아에게 사도의 직분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에게 요구되는
해방을 바라는 사람들, 십자가를 바라보는 예수님 | 누가복음 19:28~44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십자가 지시기 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은 여러 가지 모순된 극적 장치들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고 연출된 것인데, 모순된 극적 장치들로 인해 그 의미가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모순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시는 일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도 그 중 하나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무리가 들고온 것을 "나뭇가지(마21:8)"라고 기록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막11:8)이라고 기록합니다. 누가복음은 나뭇가지에 대한 표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날 유대 백성들이 손에 들고 온 나무가 "종려나무(요 12:13)"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서가 가지는 기록 목적에 따른 차이점입니다. 십자가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손에 들려 있는 종려나무는 이 장면에
이 사람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 창세기 3:22~24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범죄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집행입니다. 판사의 판결이 내려진 후에는 그 판결에 따른 집행이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안식하는 복을 받은 사람들이 그 복을 상실했습니다. 복을 상실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동산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습니다. 낙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낙원은 감추어졌기 때문에 신비로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하실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 살펴 보아야 할 표현 중 하나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입니다. 이 표현은 범죄한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나님의 부르심과 교회 | 에베소서 4: 1~6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에베소서가 가지는 가치를 말하곤 했습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함이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청사진이다" "에베소서는 인간 정신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산물이다" "에베소서는 서신서의 여왕이며 신약성경의 정점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에베소서에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고 한 말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성경구절 중 하나입니다. 교회 생활을 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제 일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힘써 지키라"는 말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죽음 앞에서 부른 생명의 노래 | 창세기 3: 20~21 | 구역모임자료 | 하남교회 | 윤길주 목사
범죄한 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 완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판결문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로 이루어져 있지만 의미는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에게 죽음이 선언되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경고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복을 받은 사람에게 죽음의 그늘이 드리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언이 완결된 후 사람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죽음에 맞서 싸우지만 결국 죽음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죽음과 맞서 싸워 이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 죽음 앞에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절망만 남은 것은 아닙니다. 범죄한 사람들에게 죽음이 선언된 자리에서 구원의 실마리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아 부술 것이라는 약속에서 사람은 구원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아담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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